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폰 비스마르크 (문단 편집) === 초기 활동 === [[프로이센 왕국]] 작센 주[* 현재 [[작센안할트]] 주.] 쇤하우젠(Schönhausen) 출신 [[융커]]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. 비스마르크 가문은 15세기 [[호엔촐레른 가문]]이 [[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|브란덴부르크]] [[선제후]]로 봉해지기 전부터 [[브란덴부르크]]에 거주하던 가문으로 [[프리드리히 대왕]] 치세에 비스마르크의 큰아버지인 에른스트, 프리드리히가 군공을 세워 장성으로 진급하는 등 일약 출세했다. 그러나 오토의 아버지인 카를은 체면치레로 예비역 장교 지위만 획득한 흔한 지주였고, 전사한 에른스트와 자식이 없던 프리드리히의 토지가 가문의 상속법[* 요약하면 [[순열]]식으로 상속된다. 상속자 순위가 1, 2, 3.... 같은 식이었다면 1, 3, 5, 7… 순으로 가다가 나중에 1순위로 다시 반복되는 상속법이다.]에 의해 듣도보도 못한 친척에게 상속되는 등[* 이 토지는 비스마르크 지지자들에 의해 70세 기념 선물로 반환된다.] 오토가 장성한 시점에는 별 볼 일 없는 가문이었다. 반면 외가인 멩켄 가문은 [[베를린]]에 거주하는 [[부르주아]] 지식인 집안으로 외증조부는 법학 교수, 외조부는 대사를 역임했으며[* 외증조부가 자유주의자여서 여러 불이익을 당했으나, [[스웨덴]] 공사 시절 [[나폴레옹 전쟁]]으로 다른 직원들이 모두 도주하는 바람에 20대에 스웨덴 대사가 되었다.] 비스마르크의 어머니 빌헬미나 루이스 멩켄은 [[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]], [[빌헬름 1세]]와 소꿉친구였었다. 원래 빌헬미나는 오토의 큰아버지 중 하나와 결혼하기로 했으나,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는 외삼촌의 반대로 오토의 아버지와 결혼했다. 그렇게 결혼한 부부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. 아버지는 가정적이었으나 우유부단해 아내에게 눌려 지냈고[* 그래도 자식들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.], 어머니는 화려하고 강단있으며 사교적인 성격이었으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못해 가정에 무심했다. 그 와중에 태어난 베른하르트, '''오토''', 말츠위나 남매는 어린 나이에 기숙사 달린 학교로 보내져[* 이유는 어머니 빌헬미나가 놀러다니기 위해서였다.] 명절에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. 이때 오토는 학업에 별다른 재능이나 흥미를 보이지 않고, 언어와 고전에 심취하며 시간을 보냈다.[* 오토는 1831년 베를린의 삼위일체 교회에서 입교 의식을 치르기도 하였다.] 장성한 오토는 [[괴팅겐 대학교]]로 진학하게 된다.[* 당시 대학의 도시라 칭해지던 [[하이델베르크]]로 가지 않은 것은 오토의 어머니가 '얘 성격에 거길 보내면 큰일나겠다'싶어 그랬다고 한다.] 그렇게 진학한 대학에서는 매일을 술, [[총]], 주먹과 함께 보내며[* 한번은 친구들이 오토를 빼놓고 파티를 열였는데, 이를 알고서는 잠긴 문을 총으로 쏴서 열어 결국 파티에 참가했다.] 걸핏하면 [[결투]]하자고 난동을 부려 주변에 악명이 자자했고 총 25번이나 결투를 했다. 그리고 이때 '부르셴샤프트(Burschenschaft)'라는 자유주의자 모임에 잠깐 가입했다 탈퇴하기도 했고[* 2년 후 프로이센 당국으로부터 반정부 단체로 지정 받아 가입자들에게 공직 금지령이 내려졌다. 이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정적들에게 이 일로 공격을 받았었다.], 나중에는 각종 [[도박]]과 사치에 눈이 돌아 빚이 쌓이자 자퇴하고 [[베를린 대학교]]로 편입해 들어갔다. [[베를린]]에서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나, 공부에 대한 열정을 잃어 성적은 중간 이하로 떨어졌다.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다닌 기숙사에서 배운 유럽 각국의 언어와 고전, [[라틴어]] 덕에 어떻게든 졸업할 만한 성적이 나와 간신히 졸업했다. 비스마르크는 언어능력이 탁월했는데 [[그리스어]]와 라틴어로 의사소통 및 서신교환이 가능할 정도였고, 모국어는 물론 [[영어]]와 [[프랑스어]], [[러시아어]], [[이탈리아어]], [[스페인어]]를 구사했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했다. 이 언어능력은 비스마르크가 성인이 된 후 외교관으로서 당시의 각국 여론과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. 이렇듯 오토에게 대학 시절은 혼란 그 자체였으나, 후일 [[외교관]]으로 활동할 때 유용했던 인맥을 쌓고, 조금이나마 자유주의 물을 먹어 사고의 융통성이 생겼으며 이후 오토는 [[법관]]이 되기 위해 시험을 쳐서[* 일주일간 벼락치기로 공부했는데 이를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.] 법원 서기가 되었으나[* 당시 관습상 법관이 되려면 서기를 거쳐야 했다.], 1년 정도 다니고서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 생각해 퇴사하였다. 그리고는 외조부의 직업인 외교관에 흥미를 보여 외교관 시험[* 말이 시험이지 연줄 닿는 고위 공직자가 써오란 논문 몇개 써 오는 게 전부였다. 또한 이때 오토가 쓴 논문의 내용은 지극히 평범했다고 한다.]을 보고, 합격해 외교관이 되었으나 듣보 집안 출신이였기에 외국이 아닌 국내 프랑크푸르트의 독일 연방 외교관으로 발령난다.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경력에 도움이 된다.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며 수습 기간은 [[아헨]]에서 하게 되는데 어떤 여성과 약혼까지 했지만 빚을 지고 몇 주동안 결근했다가 면직 처벌되었다. 하지만 외교관 시험 동기[* 그의 아버지가 매우 유명한 교수였다.]의 도움으로 복귀에 성공했다. 여기에다 또 17살짜리 영국 귀족 처녀 꽁무니를 쫓아 다니며 [[스위스]]까지 무단 결근하고 넉 달동안 여행을 떠났고 당연히 짤렸다. 그럼에도 이번에도 '''역시나 운 좋게도 별 다른 징계 없이''' 넘어가기도 했다. 그후에도 도박 빚을 많이 지는 바람에 아헨에서의 생활은 어려워졌고 25세 무렵 나이에 도피성으로 [[육군]]에 입대한다. 육군 [[장교]] [[군복]]을 입고 나온 [[초상화]]가 많아서 [[군인]] 출신 정치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다른 귀족 출신 자제와는 달리 군대를 싫어했고[* 기숙학교 시절에는 체조와 체육을 싫어했다고 한다. 당시 프로이센의 교육과정에서는 체육 과목을 매우 중요시했으나 비스마르크에게는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.] 대학 시절 결투 시에 입은 오른팔 부상을 근거로 병역 면제를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을 정도였다. 병역은 외교관서 짤린 시기 [[예비역]] 육군 [[소위]]로 임관해서 소집 기간 1년을 채워야 되는데 귀찮아서 몇 달 다니다가 대충 [[땡땡이]]를 쳤는데도 전시도 아니고 관대한 지휘관을 만나 별 문제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. 훗날 독일 통일 후에 땡땡이나 치던 이 예비역 소위는 '육군 원수' 계급을 수여받는다. 1839년 어쩔 수 없이 프로이센군에 입대하였는데, 프로이센 왕실의 거처 [[포츠담]] 부근의 근위 연대였다. 당연히 높으신 분들 자제들이 몰려있는 땡보직이었다. 이마저도 1년을 못 채우고 땡땡이쳤는데 '''뒤늦게 [[농사]]를 배우려고 농업 학교에 다녀서'''였다. 농업에 깊이 관심을 보이면서,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[[포메른]] [[농장]]과 가까운 곳으로 가서 농사에 몰두했다. 이때 그는 정말로 농사에 깊이 빠져 있었는데, 농부들과 격의 없이 사투리로 대화할 정도였고, 농업 학교 당시 배운 지식을 이용하여 당시 최신 기술로 만든 [[비료]]를 도입하고, [[사탕수수]] 재배와 [[공장]]까지 만들면서 수완 좋게 농장을 [[경영]]하여 '''대학 시절과 외교관 시절에 얻은 도박 빚을 다 갚았다.''' 성공한 지주가 되자 본격적으로 [[정치]]에 뛰어 들었는데 마침 [[고향]] 근처에 [[수재#s-2]]가 나자 [[제방]] 감독관을 [[탄핵]]하고 스스로 해 보겠다며 그 자리에 앉았다. 그리고 이 무렵 막 수립된 [[의회]]에서 마침 보궐 선거 자리가 나자 본격적으로 [[공직]]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. 공직 생활 초기에는 튀어 보이려는 성향이 매우 강했는데 [[1848년 혁명]] 당시엔 강경 진압을 주장하면서 '''자기 영지의 [[농민]] 40명을 무장시켜 [[베를린]]으로 가서 군중 폭동을 진압하려 했다.'''[* 옛 상관 [[포츠담]] 연대장에게 이를 알리자 연대장은 국왕의 진압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고 떨어진다고 해도 농부들의 도움은 필요없다고 했다. 비스마르크도 자신의 계획이 허망함을 알고 포기했다.] 이후 베를린으로 잠입해서 왕실 인사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역쿠데타의 주역이 되려고 했는데 이 때 [[빌헬름 1세|빌헬름 왕자]]의 부인이었던 [[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|아우구스타]]에게 역적 아니냐는 오해를 사게 되고 이런 불편한 관계는 수십년간 비스마르크를 괴롭히게 되었으며 혁명 진압 이후 국왕 [[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]]는 [[부르주아]]들과 [[자유주의]]자들의 요구를 일부 받아 들여 납세액에 비례한 제한 선거를 허용해서 기득권층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. 이들은 '''[[의회]] 같은 건 필요 없다'''며 자신들의 의회마저 없애달라고 주장하게 되는데, 비스마르크는 이때 국왕의 뜻에 따라야 된다고 주장했다. [[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]]는 이 시기 전후로 비스마르크를 매우 눈여겨 보았는데 혁명 후 비스마르크가 결혼을 하고 [[베네치아]]로 [[신혼여행]]을 하자, 마침 우연히 그곳에 체류 중이던 국왕이 직접 비스마르크를 불러 독대하고[* 비스마르크의 베프인 [[알브레히트 폰 론]](Albrecht von Roon) 장군이 국왕의 수행 무관이었다. 폰 론 장군은 [[보불전쟁]] 당시 국방장관으로도 활약한다.] 베를린으로 돌아오자 듣보잡 비스마르크를 일약 독일 연방 의회의 프로이센 대사로 임명하게 된다. 이런 벼락 출세 덕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는데 그의 예전 행적을 들어 '''술고래 대학생, 타락한 융커, 포메른의 돼지치기'''는 안 된다는 여론의 반발이 있었고 왕세제 빌헬름 왕자조차 "한낯 예비역 기병 소위 에게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면 곤란하다."라며 부정적인 반응이었다. 어쨌든 이런 해프닝 이후 [[1851년]]부터 외교관으로 복귀하여 [[프랑크푸르트]] 독일 연방 의회 외교관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오스트리아의 주도권에 맞서서 북독일의 프로이센 위주의 복수주도권을 주장하게 된다. 연방 회의에서의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일화로 소위 '위신 투쟁'이라 불리는 사건도 있다. 당시 연방 회의 의장국이자 실질적인 맹주였던 [[오스트리아 제국]] 대표만이 회의석상에서 [[담배]]를 피울 수 있었는데, 비스마르크가 '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가?'라며 의장에게 직접 불을 청해 담배를 피운 것이다. 고작 담배 한 개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 행동은 꽤 큰 파장을 불러온 초유의 사태였다. 당황한 각국 대표들은 본국에 이를 보고하며 '담배를 피워도 되겠는가'를 묻기까지 했고, 결국 [[바이에른 왕국]] 대표 카를 폰 슈렌크(Karl von Schrenck)를 시작으로 비흡연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대표들이 차례로 담배를 피워 물기 시작했다. [[작센 왕국]] 대표 율리우스 고틀로프 폰 노스티츠(Julius Gottlob von Nostitz)는 내각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지만, [[하노버 왕국]] 대표가 피우는 것을 보고 고심 끝에 그 다음 석상에서 결국 실행에 옮겼다. 본인 말로는 '칼집에서 칼을 뽑는' 기분이었다고 한다. 나중에는 비흡연자들까지 '조국을 위해 담배를 피우는 희생'을 하였고, 헤센다름슈타트 대표만이 유일하게 담배를 피우지 않은 한 사람으로 남았다. 프로이센이 더 이상 오스트리아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담배 한 개피로 주장한 것이다. 이후 독일 연방의회에서 [[임기]]가 끝나고 [[1858년]]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쫓겨나 [[크림 전쟁]]에서 러시아 편을 들어 중립을 주장한 인연으로 [[상트페테르부르크]]로 발령받았다. 이 때 [[알렉산드르 2세]]와 [[차르]] 가족까지 몰려 나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. 비스마르크의 외교 기본 방침 중 하나인 '''대러 친선'''은 이 시기부터 이어진다.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죽고 빌헬름 1세가 즉위한 후, 군비 확대와 [[징병제]] 기간 연장을 두고 의회와 충돌하자 전격적으로 프로이센 [[총리]]에 임명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